극복사례

자궁암 | 장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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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rmkorea 작성일17-05-01 18:41 조회1,77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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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소암이라는 병마와 맞닥뜨린 2004년

 

배가 살살 아프면서 하혈이 시작된 2004년 2월, 그전부터 자주 배가 살살 아프면서 변비가 생기는 증상으로 대장조영술을 받았지만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전에는 정상적이던 생리가 1월에는 없더니, 생리기간이 아닌데도 하혈이 심해졌다. 잔뜩 불안한 마음으로 동네 산부인과를 찾았다.

복부초음파 검사를 하고 나니 의사는 "갱년기 증상으로 하혈이 심할 수 있다."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괜찮아질 거라는 그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하혈 증상은 수그러들지 않고 계속됐다. 20녀일 하혈을 하다보니 체중이 7~8kg이 빠지고 만성피로감이 심해 다들 어디 아프냐고 했다.

이런 나를 보다 못한 언니가 분당에 잘 보는 산부인과가 있다며 가보라고 했다. 병원에 가서 다시 복부초음파를 받았다. 복부초음파를 하던 의사가 진료 도중에 더 큰 유명 종합병원으로

"급한 환자를 보내겠다."며 전화를 했다.

깜짝 놀란 나는 "왜 그리 가야 하느냐?"고 물었다.

"난소에 혹이 보이니 큰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고 설명을 들어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바로 분당에 있는 종합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해 접수를 하고, 받으라는 검사를 받았다. 다음날, 결과를 보기 위해 가니 난소에 암이 있고, 악성암일 가능성이

70%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했다.

그렇게 난소암이라는 병마는 2004년 4월 초, 소리 없이 나를 찾아와 자신의 존재를 내게 각인시켰다. 건강할 때는 그저 남의 일로만 생각했던 암이, 내 일이 되었다. 42살의 나이에 암이라니!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왜 하나님께서는 열심히 살아온 나에게 큰 시련을 주시는 걸까?

두 눈에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서 모든 걸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하나님, 제발 수술 잘 받고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하게 해주세요!"

차차 마음이 편안해지고 새로운 새 삶의 희망이 생겼다.

난소암 CT 검사를 한 결과, 다행히 전이된 곳은 없었다. 하지만 난소암은 수술 후 전이가 많이 찾아오니 난소, 나팔관, 자궁까지 모두 적출하는 수술을 하는 게 좋다고 했다.

 

복강경으로 난소암 수술을 받다

 

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나서 빠르게 잡은 수술날짜는 4월 30일, 아직 젊으니 복강경 수술로 하면 수술자국이 적다는 의사의 말대로 복강경 수술로 결정했다.

드디어 수술 당일, 계속되는 출혈로 지혈제를 맞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의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술이 잘 되었습니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수술을 마치고 나서도 계속 배가 살살 아파 진통제를 복용했다.

의사나 간호사에게 물어보면 "수술 후에는 아플 수 있다"고만 할 뿐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병원에 계속 입원해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5월 10일 퇴원했다.

집에 와서는 배가 아픈 증상이 더 심했다. 특히 새벽이면 애를 낳을 때의 통증보다 50배는 넘는 듯한 아픈 통증이 찾아왔다. 배를 쥐어짜듯이 아프기 시작하면 숨조차 쉬기 힘들 정도였다.

어느 날, 더는 심한 통증을 참지 못하고 새벽에 수술을 받은 병원의 응급실에 실려갔다. 응급실에서도 내 증상이 수술의 후유증으로 보인다는 말뿐이었고, 통증이 심해 진통제를 맞아도 효과가 없으니

부인암센터로 입원하도록 했다. 나를 수술했던 의사 또한 배가 계속 아픈데도 이렇다 할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회진을 도는 젊은 레지던트에게 "도대체 왜 배가 계속 아프냐?"고 물었다.

"장에 이상이 있다는 설명, 못 들으셨어요?"

장이라니? 뭔가 수술하면서 이상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그떄서야 의사와 간호사들이 나와 가족들이 물을 때마다 쉬쉬하면서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이유가 이거였구나 싶었다.

다음날 주치의의 회진 시간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회진 시간, 의사에게 "내 장에 이상이 있느냐?"고 물었다.

의사는 당황하는 표정으로 "누가 그런 말을 했느냐?"고 오히려 되 물었다. 주치의 옆에 있는 레지던트를 손으로 가리키며 "사실대로 말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주치의는 "잘못 안 것" 이라며 잡아뗐다. 내게 사실을 말해준 레지던트는 큰 소리를 듣는 듯했고, 이후 회진에서는 그 레지던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통증이 심하니 진통제를 계속 맞으면서 금식했다. 콧줄을 끼고 20여 일을 입원해 있으니 통증이 좋아져서 퇴원을 결정했다.

 

새벽마다 응급실행, 외과진료로 알게 된 장 유착

 

하지만 집에 돌아와서도 새벽 1시만 되면 극심한 복통이 찾아와 매일 응급실에 가야 했다. 내 주치의는 계속 수술을 했던 그 의사였다.

고심 끝에 주치의에게 "장의 상태를 확인해야 하니 외과 진료를 보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의사가 이 말을 귀담아 듣지 않기에

"그렇다면 나도 살아야 하니 다른 병원으로 가겠다."는 말을 한 후에야 외과진료를 볼 수 있었다.

외과의사에게 내내 궁금했던 부분을 물었다.

"난소암 수술한 다른 환자들은 이러지 않던데 왜 저만 통증이 심할까요?"

그러자 "부인암센터 의사에게 설명을 못 들었느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복강경 수술을 하는 중에 장 유착이 생겼습니다. 지금은 장 폐색 까지 와서 상태가 심하니 콧즐과 금식, 수액, 진통제로 버티는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으로선 3개월도 어렵습니다."

"수술 도중에 그랬으면 왜 가족이나 환자에게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요?"

내 말에 외과의사는 '수술로 인해 장 유착이 되더라도 의료진과 병원에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내용에 사인한 것을 컴퓨터로 보여 주었다. 그런 동의서에 가족 중 누가 사인을 했을까 싶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수술하는 동안, 밖에서 기다리는 남편을 불러 수술 전에 쓴 동의서 외에 다시 동의서를 한 장 더 쓰게 했다고 한다. 남편에게 이런 사실을 확인하니

"빨리 사인을 안 하면 환자 죽는다."고 해서 수술전에 수술동의서가 하나 더 필요한 줄 알고 내용을 읽어보지도 않고 사인을 했다는게 아닌가.

그제서야 왜 통증이 사라지지 않는지 알게 된 나와 가족들은 무책임하게 방관으로 일관한 의사에게 화가 났다. 남편이 수술을 했던 부인암센터 의사에게 찾아가 한바탕 항의하는 소란이 일었다.

그로부터 1주일 후, 그 의사는 돌연 해외연수를 떠나버렸다.

수술을 한 의사는 떠나면 그뿐일지 모르지만 나느 계속 장 유착과 폐색으로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물 한 모금도 못 넘기니 콧줄을 달고 진통제만 투여할 뿐이었다.

외과의사는 방법이 없는 내가 안쓰럽다며 다른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아보라고 의뢰서를 끊어 주었다.

 

이 병원에서 저 병원으로, 다시 수술한 병원으로

 

수술한 병원에서 4개월을 고생한 나는 8월 30일, 그동안의 검사결과를 챙겨 삼성의료원에 갔다. 내가 가져간 기록과 삼성의료원에서 새로 받은 검사결과를 확인한 의사가 입을 열었다.

"이것은 수술한 병원에서 책임을 져야지 저희 병원에서 어떻게 해볼 치료방법이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다시 수술한 병원으로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한가닥 희망을 걸어봤지만 방법이 없다는 말을 듣고, 다시 수술한 병원에 입원해 콧줄을 달았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던 가족들이 다시 서울아산병원에 가보자며 나를 설득했다.

11월 2일 서울아산병원 진료실, 가져간 검사결과와 서울아산병원에서 새로 받은 검사결과를 비교한 의사의 말은 냉정했다.

"며칠 남지 않은 환자를 왜 진료의뢰서를 끊어 보냈는지, 그 병원도 참 양심이 없습니다. 저희로서도 어떻게 치료할 수 없으니 수술한 병원에 가실 수밖에 없습니다."

이 병원, 저 병원 내로라하는 병원을 전전하는 동안 지칠 대로 지쳐갔다. '이대로 있다가는 아무런 정리도 못하고 눈을 감을 수도 있겠구나.' 싶은 마음에 집으로 가서

마지막 정리를 하기로 했다.

다음날인 3일, 힘들게 새벽기도를 다녀오는데 언니와 형부가 마지막으로 혹시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데려다 주겠노라고 했다. 시골에 계시는 아버지에게 마지막 인사라도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언니와 함께 고향인 경북 안동으로 갔다. 다시 서울로 올라온 밤 10시에 나는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119구급차에 실려 수술한 병원 응급실에 입원했다. 누워 있는 나를 두고

'오늘밤 12시를 못 넘긴다'는 말도 들려왔다. 살려고 그랬는지 통증은 심해도 정신은 있었다.

다시 시작된 지긋지긋한 병원 생활, 12월 14일 '병원에서 죽느니 집에 가서 죽는 게 낫다.'는 마음으로 퇴원을 해버렸다.

 

퇴원 후 기도, 운동하며 천연물 요법에 매달리다

 

'이제 나의 삶은 마지막이구나!'

병원이 아닌, 하나님과 식이요법에 의지해 기적을 찾기로 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신장염이 있었던 나는 이미 식이요법으로 신장이 건강해졌기에 주변에서

'그래도 병원에서 치료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들 해도 망설임은 없었다.

BRM연구소의 식이요법 프로그램대로 자연식을 하면서 로얄젤리, 버섯균사체, 효모, 유산균, 녹즙 등 여러 가지 건강보고식품을 열심히 먹었다.

육식을 하면 가스가 많이 차서 괴로우니 채소 위주의 반찬에 잡곡밥을 소식했다. 아침 겸 점심을 11시에 먹고, 저녁을 오후 5시에 일찍 먹었다. 장에 가스가 차지 않도록

유산균을 하루에 20~30포씩 먹었다.

또한 날마다 통증으로 복대를 한 배를 부여잡은 몸으로 새벽기도를 하고, 저녁마다 한 시간씩 걸었다. 집에서 가까운 학교운동장 400미터를 도는데 40분이 넘게 걸렸다.

통증이 심할 때는 퇴원하면서 병원에서 알려준 대로 직접 배에 진통제 주사를 놨다.

3개월 동안 철저하게 식이요법과 운동, 기도로 생활하니 통증이 줄어 진통제를 하나씩 끊을 수 있었다. 병원에서도 치료방법이 없다고 했던 몸이 얼마나, 어떻게 좋아진 것일까?

2005년 2월 13일, 병원에 갔다. 검사결과를 본 의사가 깜짝 놀라며 "지난번보다 페색이 덜하고 50%이상 좋아졌는데, 어느 병원에서 치료를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냥 집에 있었습니다"

의사는 "그럴 리가 없다"며 내 말을 그대로 믿지 않았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지긋지긋한 통증을 떠나보내기까지의 일을 쭉 떠올려 볼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나를 시험하셨던 그 시간들에 감사하다. 물론 지금도 장 유착이 있으니 매일 아침 2시간씩 화장실에 앉아 복부마사지를 1시간 넘게 하면서

배변하느라 고생하는 것을 여전히 내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다.

암에 걸렸을 때는 저녁에 눈을 감으려면 죽음이 보였다. 눈을 감고 잠들면 죽을까봐 불안하다.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하니 기독교든, 불교든 마음을 편안하게

가질 수 있는 신앙을 갖는 것이 투병에 도움이 된다. 모태신앙이면서 기독교인이지만 새벽기도 한 번 안 하던 나였지만 통증으로 울며불며 새벽기도를 시작한 후로는

모든 것을 받아 들이게 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도 감사하고, 먹을 수 있는 것도 감사했다.

운동도 중요하다. 기력이 없어도 집에서만 우울해 하지 말고 밖으로 나가 산책을 하고 움직여야 한다.

주민센터에서 많이 하는 웃음치료, 노래교실이라도 좋다.

요즘 나는 다시 태어났다는 마음으로 산다. 받은 만큼 나누기 위해서라도 더 건강해져야 한다.

가족들에게도 감사한 마음이 넘치니 화를 낼 일이 없다. 통증이 심할 때는 제 정신이 아니어서 식구들에게도 화를 내고, 밥그릇까지 던지던 못난 나를

다 받아준 사람들이니 소중하고 감사하다. 더 건강해지면 호스피스 병동에 가서 환자들을 위해 지내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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