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암 | 황효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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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rmkorea 작성일17-03-14 18:27 조회3,63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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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병원에 가기를 끔찍이도 싫어하던 나는 2004년 2월 무렵부터 몸이 안 좋아졌다.
B형간염이 있는데 나른하고 매사 의욕이 없는 정도가 심했다. 아이들이 보기에도 아빠가 어디가 아픈가 싶어 자꾸 걱정을 했다. 가족들의 성화에 영등포에 있는 작은 동네병원에 가니
종합검진을 권해, 여러 가지 검사를 받고 왔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이왕에 받은 검사이니 며칠 뒤에 결과를 보기위해 병원을 찾았다. 누가 등이라도 떠미는 것처럼 쭈뼛거리며 진료실에 들어섰다. 그런 나를 보며 의사는 진료의뢰서와 검사결과를 주었다.
"미루지 말고 당장 큰 병원에 가보셔야 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병원에 가는것이 내키지 않아 자동차 트렁크에 진료의뢰서와 검사결과를 넣어둔 채 6개월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건강을 신경 쓰기는커녕 마음 한구석이 무거우니 평소보다
더 많은 술을 마셔댔다. 사실 아프기 전부터 거의 매일이다시피 술을 마셨다. 주변에서도 1년이면 366일 술을 마신다는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였다. 간이 나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 술을 마시면 밥을 안 먹고
공복에 마시는 경우가 많고, 안주도 거의 먹지 않는 게 습관이 됐다.
몸이 계속 나빠져서 더 버티지 못하고 집에서 가까운 유명 종합병원을 찾은 것은 2005년 1월의 일이다. 검사를 받고 나서 나는 먼저 집으로 돌아왔고, 이때 의사는 가족들을 불러 간암이 무려 20CM에 이르는
큰 암덩어리가 있는 말기 간암으로, 길어도 3개월을 살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했다.
집에 온 아들에게 "의사가 뭐라고 하더냐?"고 물으니 아버지 성격을 잘 아는 아들은 숨기지 못하고 그대로 들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아들의 입에서 '간암 말기'라는 소리르 듣는 순간, 몸을 일으킬 수조차 없는 충격에 휩싸였다.
정확한 진단을 받고 나니 몸이 반란이라도 일으키듯 통증이 심해졌다. 그럴 때마다 병원에서 준 진통제를 먹으며 고통 속에서 버텨야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간암 말기라니! 치료할 아무런 방법조차 없다니!' 믿기지 않는 현실, 그러나 방법이 없다는 데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어느 정도 마음의 정리를 한 채 지낼만한 요양원을 찾아다녔다.
'수술도, 간이식도 안 되는 간암 말기라니!'
겉으로는 내색 안 해도 속으로는 마음정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아이들이 삼성의료원에 가서 다시 검사를 받아보자고 했다.
이름이 많이 알려진 특진의사를 찾아 검사를 받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수술도 안되고, 간이식도 안되는 상태입니다. 해볼 수 있는 것을 동맥조영색전술뿐입니다."
유일하게 해볼 수 있는 방법이라는 말에 색전술을 받기로 했다. 설명을 들으니 입원한 다음날 색전술을 하고, 그 다음날에 퇴원을 할수 있다고 했다. 오래 입원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니 그만하면 크게 고통스럽지 않은 방법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색전술을 받고난 후에는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복수가 차서 고생했다. 색전술을 받은 날 저녁, 아이들이 퇴근해서 날 보러왔는데,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나중에 꺠어나서 보니 쓰러져서 3~4시간 정신을 못 차렸다고 했다.
꼬박 1주일을 병원에서 지낸 나는 의사에게 '죽더라도 집에 가서 죽고 싶으니 제발 퇴원시켜 달라'고 했다.
"일단 몸을 추스르신 다음, 20일 정도에 한번은 색전술을 받는 게 좋습니다."
'요양원에서 식이요법을 하며 보낸 5개월'
고통스러운 색전술을 받고 나니 주변정리를 해놓고 싶어 고향인 거제도로 향했다.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얼마간의 땅을 팔아서 세 아이 앞으로 나누어 주었다.
고향집에 잠깐 머무르는 동안 아는 이들이 문병을 오기 시작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아픈 모습을 보이는 것이 마음이 편치 않아 조용히 지낼 수 있는 곳을 찾기로 했다.
여기저기 알아보는 과정에서 강원도 원주 문막에서 요양이 가능한 곳을 찾게 됐다. 아내와 함께 그곳에서 지내면서 자연식과 운동을 해볼 요량이었다.
요양하러 떠나기 전에 삼성병원 진료를 받았는데, 나를 본 의사는 다시 색전술을 하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됩니다. 색전술을 받더라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을 때 받겠습니다."
병원에서 나오는 길로 바로 차를 타고 문막으로 향했다. 요양 중인 환자가 12명가량 있엇는데, 그 중 내 상태가 제일 나빴다.
이즈음 서울에 있는 아이들이 인터넷을 통해 식이요법으로 간암이 나은 환자들의 사례를 접했고, BRM연구소도 알게 되었다.
내 진료기록을 가지고 식이요법 상담을 받은 아들이 식이요법 식단과 간암에 좋다는 선학초나 인진쑥 등 여러 가지 천연물을 달인 물 등 몇가지 보조식품을 가져왔다.
연구소에서 알려준 암환자의 금기음식, 권장음식을 붙여놓고 잘 지켰다. 반찬은 싱겁게 먹고 화학조미료는 쓰지 않았다. 다만 바닷가가 고향이니 생선은 워낙 좋아했고,
고기 반찬도 가리지 않고 잘 먹었다. 녹즙은 식전에 하루 3번 만들어 마셨는데, 아내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환자랍시고 내가 내는 짜증을 다 받아주면 민들레가 좋다는 말에 시간만
나면 민들레를 캐러 다녔다.캐온 민들레는 오염 물질을 없애기 위해 다듬어서 식초에 담갔다가 깨끗이 씻어 즙을 내곤 했다.
이때 민들레만 즙을 내면 양이 적고, 써서 마시기 어려우니 신선초, 케일, 미나리, 쑥 등에 사과 같은 과일을 넣어 녹즙을 냈다. 녹즙은 거의 2년 동안 꾸준히 마셨다.
'크기가 줄어들기 시작한 암 덩어리, 드디어 완치되다'
식이요법을 하면서 조금씩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처음 오양하러 갈 때는 꼼짝달싹 못하고 차에 실려갔지만 5미터, 10미터, 50미터, 100미터 하는 식으로 조금씩 운동거리를 늘려
몇 개월이 지날 무렵 에는 작은 산을 한 바퀴 돌 수 있는 체력이 됐다. 요양 5개월이 되면서는 직접 운전을 해서 원주 시내도 나가고 서울에도 일이 있으면 운전을 해서 다녀왔다.
간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은 지 8개월 만인 9월, 삼성병원에 진료를 보러 갔다. 몇 가지 검사를 받고 나서 결과를 보기 위해 의사와 마주 앉았다.
"어떻습니까? 제가 다시 입원을 해야 됩니까?"
"입원할 필요는 없습니다."
의사의 말에 내 상태가 좋아진 것인지, 나빠진 것인지 구분이 안돼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의사가 다시 물었다. "그동안 뭘 드셨습니까?"
대체의학에 배타적인 의사들이 많았기에 식이요법을 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고향에 가서 몇 개월 지내다 왔다고만 했다.
"한 달 후에 다시 오셔서 검사를 다시 받아 보세요."
자세한 설명은 없었지만 일단 몸이 좋아졌구나 싶어 안심이 됐다. 이후로는 2개월마다 정기검진을 받았다.
병원에서는 상태가 조금 나아지니 다시 색전술을 권했다. 하지만 식이요법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흔들리지 않았고, 결국 쉽지 않았던 암과의 싸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처음에는 20cm이던 암덩어리가 12cm로 줄고, 식이요법을 한 지 1년이 되어갈 무렵에는 이것도 깨끗하게 궤멸됐다는 진단을 받았다.
2개월마다 받던 검진은 3개월 간격으로, 다시 4개월, 6개월 간격으로 점차 기간을 늘려서 받게 됐다.
암줄기세포의 재분화를 돕는 식이요법으로 건강을 회복하고 나니 다시 일을 해야겠다 싶어 아들에게 맡겼던 공장을 다시 운영하기 시작, 6년을 더 일했다.
'의욕 넘치는 마을이장으로 사는 요즘생활'
그러고나니 번잡한 도시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여러 곳을 다녀 보다가 충남 서산에서 마음에 드는 여미리 마을을 발견했다. 물론 기꺼이 내 뜻을 따라 준 아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아내였지만 서산으로 내려가자는 말에 반대하지 않고 흔쾌히 허락했다.
내가 항암치료나 수술을 하지 않고 간암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재분화요법 덕분이다. 건강을 회복하고 나서는 5년 전, 번잡한 서울을 떠나 충남 서산으로 이사했다.
올해는 동네 이장이 되어 더욱 바빠졌다.
서산에 내려온 첫 해는 운산면 여미리 4반 반장으로 마을 일을 시작했고, 다음해는 여미리의 총무를, 올해는 여미리 이장으로 마을 일을 보고 있다.
어르신들이 많은 농촌이라서 크고 작은 마을 일과 잡일을 하다 보면 하루가 훌쩍 지나간다. 사실 이장은 도시에서의 통장과 비슷한 데도 하는 일은 거의 동장 수준이다.
오늘만 해도 오후에는 중요한 동네사업 심사가 있어 준비할 것이 많다.
'하루하루 헛되지 않게 살고파'
매일 새벽, 눈을 뜨면 닭 모이를 주고, 텃밭 일을 한다. 작은 텃밭농사지만 꽈리고추, 대추, 고구마, 감자, 들깨 등을 조금씩 길러 자식들에게 주고, 이웃과도 나누어 먹는다.
그래도 남는 농산물은 농협 공판장에 내다 팔고 있다.
지금의 내 생활은 서울에서 살 때와는 딴판이다. 도시에서는 같은 아파트, 같은 층에 살아도 얼굴조차 잘 모르고 산다. 어쩌다 엘리베이터를 타서 이웃을 만나더라도 인사를 나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물론 문화생활을 즐기는 데는 도시가 편리하지만 시골에서는 사람과 어울려 사는 일이 자연스럽다. 바쁘고 어려울 때 서로 돕는 이웃 사이가 살갑다.
품삯을 주고받는 대신 서로 품앗이를 해서 농사일을 해결한다.
내가 이곳에 터를 잡고 사니 자식들도 자주 내려와 자식, 손자에 15명이 북적북적일 때면 사람 사는 것 같다.
또 도시에 사는 지인들이 시간만 나면 놀러 와서 며칠씩 묶고 간다. 1년 내내 손님이 끊이지 않으니 시골에 살아도 외로울 틈이 없다
사실 아프기 전에는 시골에서 올라와 어렵게 살아와 자식, 아내 챙길 여유 없이 일만 했다. 아프고 나서야 가족의 소중함, 고마움에 가슴이 메었다.
이웃에 대한 고마움도 크고 헛되지 않게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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